머리가 맑아지고 혈액순환이 좋아진다는 말과 함께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성분이 은행잎 추출물(Ginkgo biloba)입니다. 특히 기억력이 걱정되는 중장년층에게 은근히 '치매 예방'을 암시하는 광고 문구와 함께 자주 권해지는 성분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가장 크게 진행된 임상시험은 은행잎 추출물이 치매 예방에 효과가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다만 이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 그리고 항응고제를 복용 중이라면 왜 더 주의해야 하는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가장 크게 진행된 임상: GEM 연구가 본 것
2008년 미국 의학저널 JAMA에 발표된 GEM(Ginkgo Evaluation of Memory) 연구는 미국 5개 의료기관에서 75세 이상 고령자 3,069명(정상인지 2,587명, 경도인지장애 482명)을 모집해 무작위 대조 시험(RCT, 참가자를 무작위로 치료군과 대조군에 배정해 다른 변수의 영향을 통제하는 연구 설계)으로 진행됐습니다.
참가자들은 은행잎 추출물 120mg을 하루 2회, 중앙값 6.1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복용했습니다. 그 결과 위약군과 비교했을 때 치매나 알츠하이머병 발생률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표본 규모와 추적 기간을 감안하면 신뢰도가 높은 결과로 평가됩니다.
예방과 증상 완화는 다른 질문입니다
여기서 정확히 구분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GEM 연구는 아직 치매가 없는 건강한 고령자와 경도인지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치매 발생을 미리 막을 수 있는가'를 본 예방 연구입니다. 이미 치매 진단을 받은 환자의 증상이 완화되는지를 본 연구가 아닙니다.
영양제 임상을 읽을 때는 '예방'과 '진행 지연'을 구분하는 게 중요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발병을 막는 것과 이미 질환이 있는 사람의 악화를 늦추는 것은 전혀 다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GEM은 전자에서 음성 결과를 냈을 뿐이고, 이미 인지장애가 진행된 경우의 증상 완화 여부는 이번 조사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혈액순환 개선'이라는 표현, 근거는 어디까지
은행잎 추출물 광고에는 '혈액순환 개선', '기억력 증진' 같은 표현이 흔히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뒷받침할 만한 대규모 인체 임상 결과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가장 크게 진행된 GEM 임상이 치매 예방이라는 핵심 주장에서 음성 결과를 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광고 문구와 실제 근거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게 정직합니다.
국내 식약처는 건강기능식품의 기능성 표시에서 질병의 예방·치료 효능이 있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표현을 금지하고, '~에 도움을 줄 수 있음' 형태로만 제한합니다. '치매를 예방한다'거나 '기억력이 좋아진다'고 단정하는 문구를 보신다면 이 기준을 벗어난 과장일 가능성이 큽니다.
항응고제·항혈소판제와 병용하면 위험합니다
은행잎 추출물에서 가장 단정적으로 알아야 할 부분은 출혈 위험입니다.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 아스피린·클로피도그렐 같은 항혈소판제, 그리고 일반 소염진통제(NSAIDs)와 함께 복용하면 항응고·항혈소판 효과가 가산되어 출혈 위험이 실제로 높아집니다.
이는 근거가 갈리는 논쟁적 사안이 아니라 여러 약물상호작용 문헌이 일치하는 확인된 위험입니다. 위 약물을 복용 중이라면 은행잎 추출물을 자의로 병용하지 말고, 반드시 의료진의 명시적인 승인을 받은 뒤에만 시작해야 합니다.
수술·시술 앞두고 있다면 반드시 중단 고지
수술이나 시술, 치과 발치 같은 처치를 앞두고 있다면 복용 중인 은행잎 제품을 의료진에게 반드시 미리 알려야 합니다. 정확한 중단 시점과 기간은 개인의 건강 상태와 시술 종류에 따라 달라지므로, 스스로 판단해 임의로 며칠 전에 끊는 방식보다 의료진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깅콜산 알레르기, 확인해야 할 사람들
은행잎 추출물은 플라보놀배당체와 테르펜락톤 함량으로 표준화되는데, 여기에 함께 들어 있는 깅콜산(ginkgolic acid)이라는 성분은 국제 약전(미국·유럽·중국)에서 알레르기 유발 우려로 그램당 5마이크로그램(μg/g) 이하로 엄격히 제한합니다.
깅콜산은 옻나무의 알레르기 유발 물질인 우루시올(urushiol)과 구조적으로 비슷해, 소화기 장애·두통·피부자극·부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옻나무·망고껍질·독나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면 특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국내 식약처 공전의 정확한 기준치가 국제 약전과 일치하는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으니, 정제 규격이 명시된 제품을 고르시는 게 안전합니다.
그래도 시도해볼 수 있는 경우
그렇다고 은행잎 추출물을 무조건 피할 성분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근거로 확인된 것은 '건강한 고령자의 치매 예방'에는 효과가 없다는 것뿐입니다. 항응고제 등 병용 약물이 없고 알레르기 우려가 없는 경우라면,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시도해보는 것 자체가 큰 손해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치매를 예방한다'는 기대를 갖고 복용하는 것은 지금 근거와 어긋납니다. 이미 기억력 저하나 인지 문제로 병원 진료를 받고 계신 상태라면, 보충제보다 진단과 처방을 우선하고 은행잎 추출물은 담당 의료진과 상의한 뒤 보조적으로만 고려하시길 권합니다.
나에게 필요할까: 자가 판단
은행잎 추출물을 고려하고 계시다면 아래 기준으로 먼저 점검해보시길 권합니다.
AS·병원 진료가 필요한 신호
은행잎 추출물을 복용하다가 평소보다 멍이 잘 들거나, 코피·잇몸 출혈이 잦아지거나, 작은 상처에서 피가 잘 멎지 않는다면 출혈 경향이 높아진 신호일 수 있으니 복용을 멈추고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두통이나 어지럼증, 피부 발진이 새로 생겼다면 깅콜산에 대한 과민반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기억력 저하가 실제로 걱정되는 상황이라면 보충제보다 신경과·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통한 정확한 진단이 우선이라는 점도 함께 기억해두시길 권합니다.

